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교 개혁 (문단 편집) === 분열된 [[신성 로마 제국|제국]] === 사태가 이쯤 되자 [[카를 5세]]는 대립을 중재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황제 본인도 교회 개혁파 아드리안 신부(훗날 [[하드리아노 6세]])가 가정교사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가 이대론 안된다는 생각으로 교황청에 공의회를 강요했으나 교황청에선 황제 위주의 공의회를 미적거렸고 이런저런 이유가 겹쳐 빡친 황제가 로마로 군대를 보내자 그제서야 ~~[[로마 약탈]]로 참교육을 받고나서~~ 공의회를 시작했는데, 20몇년 간 교회 개혁 문제엔 거의 비협조적으로 진행하여 본인 생전에 끝을 못 봤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선 아직은 루터파 제후는 몇 없고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와 [[헤센]] [[방백]] 정도를 빼면 거의 이름 없는 인물인데다가 세력도 미약했는데 1526년 기준 당시엔 5개제후 14개 제국도시들이 루터의 주장에 지지했다.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교회령만 1/3~1/4정도에 [[합스부르크 가문]] 세력 하나만으로도 신교도를 바르기엔 충분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영지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기 때문에 루터와 그 추종자들 추방령을 당분간 유임하고 간을 보다 1529년 다시 제국 추방령을 때리자 루터파 제후들은 약속 번복과 제국법위반을 들어 1531년이 되면 신교도 제후들이 아예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여 황제에 대항했다. 아마 이 무렵의 카를 5세는 [[스페인]] 반란 진압, [[프랑스 왕국|프랑스]] 견제, [[오스만 제국]]의 견제만 해도 정신없는데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는 도시들 때려잡으랴, 제후들 때려잡는건 동생이자 [[독일왕]]으로 선출된 [[페르디난트 1세]]에게 위임했는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자리만 차지하고 독일 종교문제에 문외한이었던 형보다 독일 사정에 훨씬 해박했던 페르디난트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기도 했고 [[헝가리 왕국]]을 둘러싼 오스만 제국과의 분쟁에서 독일 제후들의 지원을 얻고자 신교도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결국 1547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잉글랜드의 [[헨리 8세]], 그리고 [[마르틴 루터]]가 연달아 세상을 떠났고, [[오스만 투르크]]와 잠시 평화협정이 맺어지자 황제 [[카를 5세]]는 생애 최대의 유감이었던 독일 내 종교 일원화를 추진한다. 공의회는 20년 넘게 배가 산으로 갈 지경으로 거의 노답 상태였고 앞서 황제 위주의 공의회 추진에 로마 교회 내부에서도 반발이 컸고 프랑스에서는 로마 교황청에 자금을 끊어버렸다. 어쨌건 [[로마 약탈]]로 교황이 거의 포로로 잡히자 열리긴 했는데 교황청의 체면을 고려하여 교황령도 아니고 합스부르크가 영지가 아닌 트렌트에서 열렸으나, 그곳은 거의 오스트리아 앞마당이었다. 이런 공의회는 신교도들은 거부했고 교황청에서는 돌림병 핑계를 대면서 거의 비협조적이었다.([[카를 5세]]가 루터파 주장을 받아들여서 사제독신 제도 폐지, 평신도 양형[[영성체]]를 요구했기 때문에 충공깽이었다.) 카를 5세가 죽고 나자 활기를(?) 띄고 처음 의제였던 교회 개혁은 번복되고 기존교리 재확인으로 끝났다. 기다리다 지친 카를 5세는 스스로 공의회 노릇을 하며 독일 전체에 루터파 의견을 약간 받아들인 자신이 직접 수정한 교리를 강요하고 반대자는 제국추방령을 때리고 신교도 제후들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때리면서 내전이 발생했다.(자세한건 [[카를 5세]], [[마르틴 루터]] 참조) 결국 황제의 구상은 실패했고 반란군에 쫓기던 황제는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고는 황위를 동생에게 물려준 뒤 [[스페인]]으로 갔다. 종교 문제에 있어서 형보다 훨씬 너그러웠던 페르디난트 1세는 파사우 합의(1552),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를 통해 루터파를 공인했고, 루터교회를 믿는 지역은 가톨릭교회를 용인하는 조건으로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 이 당시에는 독일왕이며 로마왕 자격으로 체결한 것이다. 1552년 황제가 스페인으로 도망가서... 카를 5세는 자신의 영향력이 더이상 독일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실망하여 1555년 퇴위했다. 이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 때 루터파 기존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 화의에는 2가지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하나는 신앙을 결정하는 주체가 일반 민중이 아닌 그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라는 것("Cuius regio, eius religio") 이었다. 1547년 종교전쟁시 대부분의 제후가 신교도였다는 건 사실무근이다.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헤센 방백 [[필리프(헤센)|필리프 1세]]는 나란히 황제군에 체포되어 제국 추방령을 맞았고[* 다만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6촌이자 카를 5세 편을 들었던 [[모리츠(작센)|모리츠]]와 작센 선제후-작센 공작위를 맞바꾸는 것을 조건으로 목숨은 부지헀고, 필리프 1세도 모리츠가 카를 5세를 배신하고 인스브루크에서 기습해 황제를 독일에서 꽁무니빼게 만든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나머지 소제후 10여개 제국도시들도 굴복했다. 훗날 대표적인 신교도 제후로 성장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파가 정식으로 공인되고 나서야 [[요아힘 2세 헥토르|요아힘 2세]]가 종교개혁에 나섰고, 제후들도 [[팔츠 선제후국]]의 [[루트비히 5세]]나 [[프리드리히 2세(팔츠)|프리드리히 2세]]처럼 개인적 신앙은 신교도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황제 카를 5세와 교황청을 두려워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전까지 공식적으로 자신의 영지에 종교개혁을 도입하는 제후는 많지 않았다. 따라서 제후의 신앙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는 재산을 팔고 이전해야 했다. (알다시피 이 시대는 문맹율이 90%라 농부들을 종교개혁이 뭔 소린지 신학적인 이해가 불가능했기에 별 상관없지만...) 그리고 부르주아들이 시민자치 정치를 벌이는 제국도시들[* [[뉘른베르크]], [[레겐스부르크]], [[스트라스부르|슈트라스부르크]] 등 [[자유도시|제국도시]]는 명목은 황제 직할지였으나 실상은 황제의 명은 씨알도 안먹혔고 재산과 학식 등 소양을 갖춘 시민 중심 참사회가 통치했다.]는 이 조치에서 예외라 개신교 우세지역의 가톨릭 신자나 반대의 경우는 도시에서 자신의 신앙대로 예배를 했다간 위협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이 화의가 루터파와 가톨릭만의 화의였으므로 이미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성장하고 있던 칼뱅파에 대한 논의가 아예 없었다는 것. 합의 이후 [[팔츠 선제후국]]은 가톨릭에서 루터파[* [[프리드리히 2세(팔츠)|프리드리히 2세]], [[오토 하인리히]], [[루트비히 6세]].], 루터파에서 다시 칼뱅파[* [[프리드리히 3세(팔츠)|프리드리히 3세]], [[프리드리히 4세(팔츠)|프리드리히 4세]].]로 개종했는데 이 조치가 유효한 것인지.. 또한 합의전에는 개신교세가 미약하였다가 16세기 후반 바이에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개신교로 넘어간 상황에서 [[쾰른 선제후국]]이나 뮌스터 주교구 등 지역주민 다수가 가톨릭 에서 개신교로 전향한 지역의 처리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극심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이상 신성 로마 제국은 하나의 제국으로 묶일 수 없게 되었으며, 황제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하고 제후 각각의 힘이 점차 강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강해진 제후들은 신나게 자기들끼리 계속 치고받게 되었고, 이는 결국 1618년에 [[30년 전쟁]]으로 대폭발하게 된다. [[30년 전쟁]]이 끝난 뒤에야 유럽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전쟁을 마무리짓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 비로소 개인의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칼뱅파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썼던 시기에서 100년이 더 지난 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